서경배 회장이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춰 지배구조 개선에 속도를 내고 있다. <그래픽 씨저널> |
[씨저널] 2025년 3월 아모레퍼시픽그룹 정기주주총회에서 회사 이름을 아모레퍼시픽홀딩스로 변경하는 안건이 통과됐다. 2011년 지주회사의 이름이 태옆양에서 아모레퍼시픽그룹으로 변경된지 14년 만이다.
회사 이름의 변경은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다. 2011년 태평양에서 아모레퍼시픽그룹으로의 변경은 계열사 사이의 연계를 강화하고 시너지를 도모하는 역할을 더 충실히 수행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재계에서는 이번 회사 이름 변경은 글로벌 투자자들에게 초점을 두고 이뤄진 것으로 보고 있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헷갈려 할 수 있는 ‘그룹’이라는 이름 대신, ‘홀딩스’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서 아모레퍼시픽홀딩스가 그룹의 지주회사라는 정체성을 더욱 명확하게 전달하고, 선진적 지배구조를 갖췄다는 사실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재계 한쪽에서는 서경배 회장이 승계 과정에서 전문경영인 체제로 전환을 검토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서 회장은 현재 지주회사인 아모레퍼시픽홀딩스 보통주 52.96%, 우선주 11.65%를 보유하며 절대적 지배력을 유지하고 있다. 국내 다른 오너 기업과 비교하더라도 매우 높은 수준의 지배력이다.
하지만 후계자로 점찍었던 장녀 서민정씨가 승계 구도에서 밀려나는 듯한 모습이 보이고, 차녀 서호정씨는 아직 어린 상황에서 장기적으로 서 회장이 글로벌 스탠다드를 맞추기 위해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오너경영’만으로는 글로벌 투자자 설득 어려워진 시대
서 회장은 최근 몇 년간 이사회 독립성 강화, 감사위원회 전원 사외이사 체제, 영문 공시 준비 등 지배구조 개선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이는 단순한 경영 편의 차원을 넘어, 해외 투자자들에게 ‘글로벌 스탠다드’에 부합하는 기업으로서 신뢰를 주기 위한 변화로 풀이된다.
실제로 지주회사 아모레퍼시픽홀딩스의 이사회 독립성은 상당한 수준이다. 이사 6명 가운데 과반수인 4명이 사외이사이며 사외이사추천위원회는 전원 사외이사로 구성돼있다.
그동안 서경배 회장의 영향력이 너무 강하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하지만 최근 이사회 독립성을 지속적으로 강화하면서 서경배 회장의 단독 결정 구조에서 상당히 많이 탈피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지주회사의 회사 이름을 아모레퍼시픽그룹에서 아모레퍼시픽홀딩스로 변경한 것 역시 글로벌 투자자들에게 지배구조 투명성을 강조하려는 전략의 일환으로 해석된다.
이런 상황에서 글로벌 투자자들의 시선을 더욱 사로잡기 위해서는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는 소유와 경영의 분리가 필요하다는 분석도 나온다.
로레알, 유니레버, 에스티로더 등 대부분 글로벌 대형 화장품회사는 전문경영인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에스티로더는 창업주 에스티 로더의 손자인 윌리엄 P. 로더는 에스티로더의 이사회 의장직을 유지하고 있지만 경영은 전문경영인에게 사실상 일임하고 있다.
아모레퍼시픽의 국내 경쟁업체인 LG생활건강 역시 1996년부터 줄곧 전문경영인이 회사를 맡아 경영하고 있다.
2016년까지 화장품 업계 1위였던 아모레퍼시픽이 중국의 사드보복 상황에서 LG생활건강에게 역전당한 이유를 오너경영체제와 전문경영인 체제의 차이에서 찾는 시선도 있다.
두 회사의 희비가 엇갈린 것은 중국의 사드보복이라는 특수 상황에서 전문경영인인인 차석용 전 LG생활건강 부회장이 과감하게 따이공(중국 보따리상)에게 집중한다는 결단을 내린 반면 서 회장은 따이공을 배제하는 방향으로 경영 전략을 짜면서였다.
LG생활건강에서는 차 부회장이 전문경영인으로서 타당한 결정을 내린 반면 아모레퍼시픽에서는 서 회장의 강력한 그룹 지배력 때문에 오너의 결정을 견제할만한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 승계 구도는 여전히 안갯속, 서경배의 생각은 무엇일까
후계자 문제가 여전히 안갯속에 있다는 것 역시 서 회장이 전문경영인 체제를 검토할 수 있다는 배경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장녀 서민정씨는 한때 유력한 후계자로 거론됐지만, 최근 공식 석상 활동이 거의 없어졌고 존재감도 크게 약해졌다.
반면 2023년 대규모 지분 증여를 통해 부각된 차녀 서호정씨는 1995년 생으로 아직 경영 능력을 검증받기에는 젊은 나이다.
그룹은 중국 시장 침체, 국내 뷰티업계 경쟁 심화, 북미·유럽 시장 공략 등 여러 가지 과제를 안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두 딸이 모두 경영 측면에서 보여준 것이 없다는 것은 오너경영을 계속 이어가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서 회장이 판단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서경배 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이 CES2025 개막 첫날인 2025SUS 1월7일(현지시각)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 컨벤션센터 센트럴홀 삼성전자 전시관을 방문하고 있다. <연합뉴스> |
◆ 서경배, HD현대처럼 '징검다리' 전략도 고려하나
재계에서는 서 회장이 승계 과정에서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하더라도 딸들이 경영 경험과 존재감을 키울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서일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도 나온다.
HD현대 그룹이 정기선 부회장에게 경영권을 승계하기 전에 권오갑 회장을 '징검다리'로 세운 구조와 유사한 방식을 고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경배 회장은 1963년생으로 2025년에 한국 나이로 63세다. 만약 10년을 더 경영해 서 회장이 73세가 된다고 하더라도, 1991년생 장녀 서민정씨의 나이는 45세, 1995년생 차녀 서호정 씨의 나이는 41세에 불과하다.
화장품업계의 한 관계자는 “아모레퍼시픽 그룹은 전통적으로 오너의 권한이 매우 강한 곳으로 유명하다”라며 “만약 전문경영인 체제로 바뀐다고 하더라도 오너일가의 영향력은 계속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윤휘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