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이 2023년 12월11일 서울 중구 미래에셋센터원에서 열린 한국경제인협회 '갓생한끼(한국판 버핏과의 점심)'행사에 참석해 젊은이들과 이야기하고 있다. <한국경제인협회>
[씨저널]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은 금융투자업계에서 '판'이 바뀌는 변곡점마다 남보다 앞선 시각으로 과감한 승부수를 던져온 인물이다.
박 회장은 IMF 외환위기 직후인 1990년대 말 '박현주 펀드'를 통해 국내에 간접투자 열풍을 일으켰고, 대우증권 인수 등을 통해 미래에셋을 자산규모 1위의 초대형 투자은행(IB)으로 키워냈다.
최근 박 회장의 시선은 또 다른 변곡점을 주목하고 있다. 전통 금융을 넘어선 새로운 전장, 바로 '웹3'와 가상화폐 시장이다.
미래에셋그룹이 가상화폐 거래소 코빗 인수를 추진하고 나선 배경에도 박 회장의 변곡점을 보는 눈이 자리잡고 있다. 급격한 기술 변화 속에서 디지털 금융 주도권을 놓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인 셈이다.
◆ 코빗 품는 미래에셋, '금산분리' 우회하며 웹3 영토 확장 나선다
미래에셋컨설팅은 최근 코빗 지분 인수를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NXC(지분 60.5%)와 SK플래닛(31.5%)으로부터 경영권 매입을 추진하고 있으며, 거래 규모는 약 1천억 원에서 1400억 원 수준으로 알려졌다.
재계에서는 이번 인수의 '주체'에 주목하고 있다. 미래에셋증권 등 주력 금융 계열사가 직접 나서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셋컨설팅이 전면에 나선 것은 ‘금가분리' 원칙을 우회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것이다.
금가분리 원칙이란 금융회사 가상자산에 투자하거나 관련 업체와 협업하는 걸 금지한다는 원칙으로, 2017년 발표된 행정지도 성격의 '가상자산 긴급조치대책'에서 시작해 지금까지 유지돼왔다.
미래에셋컨설팅은 지난해 9월 기준 박현주 회장이 지분 48.5%(특수관계자 지분 포함하면 91.5%)를 보유하고 있는 사실상의 가족회사다. 규제망을 우회하면서도 오너 일가의 직접적 의사결정 아래 가상화폐 사업을 추진하겠다는 전략적 판단인 셈이다.
◆ 박현주의 웹3 사랑, 하루이틀 일이 아니다
박 회장은 지금까지 여러차례 가상화폐 시장과 디지털 전환을 강조해왔다. 박 회장은 평소 “금융업계가 웹3 시대에 적응해야 한다”며 전통 금융의 패러다임 전환 필요성을 이야기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박 회장은 2025년 열린 국민성장펀드 행사에서 가상자산이 금융에 일으킬 수 있는 혁신을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박 회장은 이 행사에서 “민간이 벤처투자에 참여할 수 있도록 길을 뚫어야 하는데 벤처캐피탈(VC) 자금이 코스닥에 상장돼야 엑시트가 가능한 구조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며 “디지털 거래소에서 토큰화된 비상장 주식이 거래될 수 있으면 그 자금이 VC로 투자될 수 있다”고 블록체인과 산업 투자의 연계 가능성을 짚었다.
박 회장은 서정진 셀트리온그룹 회장과 함께 국민성장펀드 전략위원회 민간합동위원장을 맡고 있다.
미래에셋증권 내에 디지털자산플랫폼팀을 신설해 토큰증권(STO)과 비트코인 현물 ETF 도입 가능성 등에 대비해온 것 역시 박 회장이 웹3가 불러올 변화에 대해 진지하게 대비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 'KRWX' 상표 출원, 스테이블코인으로 그리는 '디지털 월렛'의 꿈
금융권에서는 미래에셋그룹이 코빗의 플랫폼을 활용해 스테이블코인 예치 및 이자 상품을 출시할 가능성을 점치고 있다. 7년 연속 적자에 허덕이던 코빗 역시 미래에셋의 자금력과 신뢰도가 수혈된다면 전통 금융의 안정성을 갖춘 디지털 자산 플랫폼으로 재탄생할 기회를 잡게 된다.
다만 미래에셋그룹이 코빗 인수를 통해 노리는 것은 단순히 거래 수수료 수취에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박 회장의 시선은 전통 금융과 디지털 자산이 연계된 새로운 생태계를 향해 있으며, 그 중심에는 ‘스테이블코인’이 자리잡고 있다.
미래에셋컨설팅은 2025년 6월 'KRWX'와 'KRWM'이라는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 상표를 출원했다. 이 상표에는 클래스 9(블록체인 소프트웨어 및 전자지갑)와 클래스 36(가상화폐 거래)가 함께 포함돼있다. 미래에셋그룹이 자체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하고 이를 보관·거래할 수 있는 '글로벌 디지털 월렛' 사업까지 염두에 두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문제는 스테이블코인과 관련된 법적 근거가 여전히 미비하다는 것이다. 정부의 가상화폐 관련 제도 정비가 지연되고 있고, 스테이블코인의 안정성 규정 등이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 놓여있기 때문에 당장 사업화에 나서기에는 불안정성이 너무 크다는 지적이 나온다.
◆ 박현주의 글로벌 전략, 스테이블코인이 '송금 혁명'의 열쇠 될까
박 회장이 불투명한 제도적 환경 속에서도 가상화폐 시장에 베팅하는 이유는 그의 '글로벌 집념'과도 맞닿아 있다. 박 회장은 과감한 인수합병(M&A)을 통한 미래에셋그룹의 글로벌 진출 전략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박 회장은 미래에셋증권의 글로벌전략책임자(GSO)를 맡고 있기도 하다.
박 회장은 스테이블코인이 이 글로벌 영토를 잇는 강력한 결제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국제 송금에 가상화폐를 활용하면 비용 측면에서 압도적 우위를 점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방식으로 해외에 자금을 송금하면 일반적으로 2.5% 이상의 송금 수수료가 발생하지만,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한 블록체인 기반 송금은 수수료가 0.5%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자본시장 전문 시장조사업체 그로쓰리서치는 ‘국경 없는 통화, 스테이블코인’이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한 송금 및 결제방식은 은행·카드사 등 다중 중개자가 필요하지 않아 수수료가 절약된다”라며 “1만 달러를 송금한다고 가정하면 신용카드를 사용할 때 250달러, SWIFT 국제송금 방식을 이용할 때 390달러의 비용이 필요하지면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하면 약 55달러로 동일 금액을 송금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는 미래에셋이 공을 들이고 있는 인도(쉐어칸 등) 등 이머징 마켓(신흥시장) 확장에 결정적 무기가 될 수 있다. 또한 글로벌 OTT, 게임, 애플리케이션 등 이용에 국경이 따로 없는 플랫폼 이용자들의 결제 인프라를 미래에셋그룹이 선점하는 것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미국과 일본 등은 이미 2025년에 스테이블코인 법제화에 나서는 등 본격적으로 금융과 가상자산의 연계를 검토하고 있다”라며 “박 회장 역시 이런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춰 선점 효과를 노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윤휘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