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저널] 2026년을 앞두고 국내 주요 대기업들의 사업전략이 본격적으로 구체화하는 가운데 재계 1위 삼성을 이끄는 이재용 회장의 경영 보폭이 크게 넓어지고 있다. 이 회장이 사법리스크를 완전히 털어내고 사실상 ‘원톱’ 체제를 갖추면서 ‘이재용의 뉴삼성’ 밑그림이 짙어지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12월 들어 일주일간의 미국 출장길에서 글로벌 주요 빅테크 경영진과 숨가쁜 일정을 보낸 것으로 알려진 이 회장은 22일에는 삼성전자 기흥캠퍼스와 화성캠퍼스를 잇따라 방문해 ‘반도체 초격차’ 기술 경쟁력 회복에 의지를 나타냈다.
이 회장이 경영 행보에 속도를 내면서 최근 실적 부진에 빠진 삼성SDI와 최주선 사장의 역할에도 이목이 쏠린다.
최 사장은 삼성의 반도체 기술 경쟁력 강화와 디스플레이 사업의 탄탄한 성장을 이끈 그룹 내 기술전문가로 꼽힌다. 이 회장의 초격차 회복 의지를 실행한 적임자인 셈이다. 반면 삼성SDI는 실적 부진으로 갈 길이 바쁜 상황에 놓여 있다.
9년 만에 영업손실에도 이 회장의 신임을 받은 최 사장이 삼성SDI의 중장기 지속가능 성장을 위한 기술 경쟁력 강화에 성과를 낼 수 있을지 주목된다.
◆ ‘엄중한 현실’만큼 악화한 실적, ‘기술전문가’ 최주선은 이재용 회장의 믿음에 부합할까
“경영환경이 그 어느 때보다 엄중할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해질 때도 있다”
최 사장이 올해 초 신년사와 7월 창립기념식에서 말한 삼성SDI의 사업 여건이다. 일시적 수요 정체 현상을 뜻하는 ‘전기자동차 캐즘’이 어느 정도인지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삼성SDI의 실적은 최 사장의 우려만큼이나 급격히 악화하기도 했다.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삼성SDI는 올해 연결기준 매출 12조9425억 원, 영업손실 1조6846억 원을 낼 것으로 전망된다. 매출은 22% 줄고 대규모 적자를 보는 것이다. 이미 올해 1~3분기 영업손실 1조4232억 원을 기록했다.
삼성SDI가 영업손실을 내는 것은 2016년 이후 9년 만이다. 전기차 시대가 개화한 이후 삼성SDI의 영업이익은 2022년 1조8080억 원, 영업이익률 9%에 이르기도 했다.
다만 급격히 부진한 실적에도 최 사장은 올해 인사에서 자리를 지켰다. 인사를 앞두고도 배터리업계에서는 최 사장의 교체 가능성을 높게 보는 관측은 많지 않았다. 올해가 최 사장의 임기 첫해였을 뿐만 아니라 이미 전기차 캐즘 탓에 삼성SDI의 실적이 지난해부터 악화 조짐을 보였던 탓에 당장의 책임을 최 사장에게 묻지 않은 것으로 해석된다.
다만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는 최 사장의 어깨가 내년에는 조금 더 무거워질 것으로 예상된다. 여전히 북미와 유럽에서 모두 전기차 배터리 판매가 유의미하게 반등하기는 어려울 것이란 관측이 나오는 가운데 삼성SDI의 기술 기반을 확고히 다져야 하는 역할도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삼성은 이재용 회장의 ‘원톱’ 체제에서 새로운 전기를 맞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이는 재무 전문가로 그룹 안팎의 살림을 꾸려온 정현호 부회장이 용퇴하면서 완전한 기술 중심, ‘초격차 회복’에 방점이 찍힐 것이란 예상이다.
1963년생인 최 사장은 서울대학교 전자공학과를 나와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전자공학 석·박사학위를 따고 하이닉스반도체(현 SK하이닉스)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2004년 삼성전자에 입사해 메모리사업부 D램 개발실장, 디바이스솔루션(DS)부문 미주총괄, 삼성디스플레이 대형디스플레이사업부장과 대표이사를 역임한 엔지니어 출신 경영자다. 그룹에서 우수한 기술전문성과 경영 능력을 두루 갖춰 반도체 기술 경쟁력을 강화하고 디스플레이 사업의 견고한 성장을 이끌어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 삼성SDI는 신중했고 기술력을 쌓는데 집중했다, 각형 배터리 경쟁력 확보 주력
2021년~2022년 국내 배터리3사 가운데 LG에너지솔루션과 SK온이 미국을 중심으로 배터리 단독 공장 및 합작공장 투자에 적극적으로 나설 때 삼성SDI는 신중한 기조를 이어갔다. 미국 전기차 시장 전망이 각광받던 당시 삼성SDI의 첫 현지 생산거점 마련에 시선이 몰리기도 했다.
삼성SDI는 경쟁사보다 늦은 2021년 10월 스텔란티스와 미국에 첫 전기차용 배터리 공장을 짓기로 했다. 초기 투자 규모도 23GWh(기가와트시)로 경쟁사와 비교해 그리 크지 않은 수준이었다. 올해 말 기준 삼성SDI의 글로벌 배터리 생산능력은 100GWh 안팎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LG에너지솔루션과 SK온보다 작은 수치다.
삼성SDI가 배터리업계의 공격적 투자가 이어질 때부터 지금까지 내실 경영, 기술력 확보에 매진해 왔음을 보여주는 대목 가운데 하나다.
최 사장은 안전성 측면에서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는 각형 배터리의 강점을 살리는 방향으로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삼성SDI는 이달 10일 미국 에너지 관련 인프라 개발·운영 업체와 2조 원이 넘는 에너지저장장치(ESS)용 리튬인산철(LFP)배터리 공급계약을 맺었다. 중국 이외의 배터리 업체 가운데 유일하게 미국에 각형 배터리를 공급할 수 있는 장점을 살렸다는 평가가 나온다.
삼성SDI의 각형 배터리는 단단한 알루미늄 캔 구조로 이뤄져 외부 충격으로부터 강하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 삼성SDI는 배터리 셀 사이에 단열재를 배치하고 열의 전달을 막는 자체 기술(No TP)을 적용해 안전성을 한층 강화했다고 설명했다.
삼성SDI가 올해 7월 국내 1차 ESS 중앙계약 시장 입찰에서 8개 사업지 가운데 6곳에서 승리한 것도 기술력이 뒷받침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삼성SDI는 경쟁사들의 LFP배터리보다 성능이 우수한 삼원계 배터리를 내걸면서도 가격 경쟁력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SDI는 ‘꿈의 배터리’ 전고체배터리 개발에서도 한발 앞서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전고체배터리는 내부 전해질을 고체로 바꿔 에너지 밀도와 안전성을 동시에 높인 차세대 제품으로 여겨진다.
삼성SDI는 2023년 국내 배터리업계 최초로 경기 수원시 SDI연구소에 전고체배터리 파일럿 라인을 완공하고 전고체배터리 상용화에 속도를 내 왔다. 개발 초기 상용화 목표를 2027년으로 유지하고 있는데 이는 경쟁사와 비교해 2~3년가량 이른 시점이다. 장상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