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오래된 제약회사 동화약품, 민병호 민강 윤창식 윤광열 윤도준 윤인호로 이어지는 '활명수' 128년
이승열 기자 wanggo@c-journal.co.kr2025-10-28 07:07:11
동화약품 창업자 민병호 선생의 아들인 민강 사장(왼쪽)과 그 뒤를 이은 윤창식 사장. <동화약품>
[씨저널] 동화약품은 현존하는 대한민국 기업 중 두산(1896년 창립)에 이어 두 번째로 오래된 기업이다. 2025년 창립 128주년을 맞았다.
부채표라는 브랜드와 활명수라는 대표 제품으로 유명하고, 후시딘, 판콜, 잇치 등의 제품도 대중에게 익숙하다.
동화약품의 주식시장 종목번호는 000020으로 현존 상장 종목 중 가장 빠르다. 동화약품보다 빨랐던 회사는 지금은 인수합병으로 사라진 조흥은행(000010)이 유일하다.
동화약품은 △한국 최고의 제조회사(1897년) △한국 최초의 제약회사(1897년) △한국 최초의 등록상표(1910년-부채표) △한국 최초의 등록상품(1910년-활명수) 등 4개 부문에서 한국 기네스협회에 등재돼 있다.
동화약품은 1897년 창업 이래 한자리(서울 중구 순화동 5-1번지)에서 동일 상호, 동일 제품으로 전통을 이어 오고 있다.
◆ 동화약품의 초기 역사 – 민강 사장과 독립운동
동화약품은 1897년 9월 궁중 선전관이던 노천 민병호 선생과 아들인 민강 선생이 동화약방을 창업하며 시작됐다. 그해 10월 고종 황제의 대한제국 선포보다 한 달 빨랐다. 민강 선생이 초대 사장을 맡았다.
한약 비방에 능통했던 민병호 선생은 궁중 비방에 양약의 장점을 취한 혼합처방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신약인 활명수(活命水)를 개발했다.
활명수는 급체나 토사곽란만으로도 사람이 죽어가던 시절에 위장장애와 소화불량에 효험을 보이며 큰 성공을 거뒀다.
그러자 가짜 활명수가 활개를 치는 등 문제가 생겼고, 두 사람은 활명수의 가치를 보호하기 위해 1910년 상표등록을 했다. ‘부채표’는 부채살이 결속되는 것처럼 힘을 합치면 잘 살 수 있다는 ‘동화(同和)’의 의미를 담았다.
민강 사장(1883~1931)은 활명수 사업과 화장품 사업을 병행하면서 초기 동화약품의 사세를 키운 유능한 경영인이자 교육사업과 독립운동에 헌신한 선각자이기도 하다.
1906년 조선약학교(현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1907년 근대식 초등교육기관인 소의학교를 각각 세웠다. 아울러 1909년 비밀결사 항일구국단체인 대동청년당을 조직하고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했으며, 3·1운동이 발발한 후에는 한성임시정부 수립에 관여했다.
민강 사장은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되자 서울연통부를 설치하고 본인이 서울연통부의 책임자를 맡았다. 서울연통부는 임시정부의 활동상을 국민에게 알리고 각종 정보와 군자금을 임정에 보고·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그는 비밀결사조직인 대동단에서도 활약했다.
이 같은 활동으로 민강 사장은 두 차례에 걸쳐 옥고를 치렀고 건강이 나빠져 1931년 48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정부는 1963년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 동화약품의 현대사 – 윤창식에서 윤인호까지
민강 사장이 별세하자 1937년 보당 윤창식 사장(1890~1963)이 동화약방의 경영권을 인수했다.
윤창식 사장은 민강 사장의 독립운동 동지이자 민족주의 사상이 투철한 민족기업인이었다. 보성고보와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를 졸업했고, 항일비밀결사단체인 조선산직장려계를 조직하며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이후에는 사업에 뛰어들어 정미업을 영위하면서 신간회 등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다.
그는 만주국 안동(현 단둥시)에 지점과 공장을 설치하며 해외로 사업을 확장하고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하는 등 제2의 창업을 이끌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전쟁으로 완파된 순화동 공장을 복구해 회사의 중흥 기반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62년에는 회사 이름을 동화약품공업으로 바꿨다.
1963년 윤창식 사장 별세 후 장남인 윤화열 전 회장(1915~2003)이 사장에 취임하며 경영권을 물려받았다.
그는 1964년 제1공장, 1965년 서소문 본사와 제2공장을 신축했고, 1967년 활명수에 탄산을 첨가한 가스활명수를, 1968년엔 판콜에이를 각각 시판했다. 또한 1971년 현대유리공업(현 동화지엔피)을 인수하고 1972년 안양공장을 준공하면서 사세를 키웠다.
1973년에는 윤창식 사장의 3남인 윤광열 명예회장(1923~2010)이 형에 이어 사장에 취임했다.
윤 명예회장은 취임한 그해 국내 최초로 희귀약품센터와 중앙연구소를 개설했고 1976년 회사를 유가증권시장에 상장했다. 국내 최초 전 사원 월급제와 종업원지주제를 실시하면서 동화약품을 업계를 선도하는 기업으로 탈바꿈시킨 것도 그였다. 1980년에는 후시딘을 출시했다.
2003년에는 윤광열 명예회장의 차남인 윤길준 현 부회장(1957~ )이 사장으로 취임했다. 2005년에는 당시 의사로 활동하던 윤도준 회장(1952~ )이 가업을 이어받았고, 2008년 윤 명예회장이 2선으로 물러나면서 3세 경영체제가 수립됐다.
2009년 사명을 동화약품공업에서 동화약품으로 변경했다.
2025년에는 윤도준 회장의 아들인 윤인호 부사장이 대표이사 사장으로 승진하며 4세 경영의 문을 열었다. 이승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