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저널] 장경호 동국제강 창업회장은 1899년 9월 부산 동래군에서 부농이었던 아버지 장윤식씨와 어머니 문염이씨의 4남2녀 가운데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장경호 창업회장은 14세가 되던 1912년 서울 보성고등보통학교(현 보성고등학교)로 유학을 갔다.
당시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부산에서 서울 보성고등보통학교로 유학을 떠났던 사람 가운데는 4·19 직후 과도정부의 내각수반을 지낸 허정 전 총리가 있었다.
두 사람은 호형호제하며 우정을 나눴다고 하며, 허정 전 총리가 정치일선에서 물러나 어려운 시절을 보낼 때 장경호 창업회장은 말없이 그를 도왔다고 전해진다.
장경호 창업회장은 일본 유학도 떠났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귀국한 뒤 농사를 크게 짓는 두 형 장경택씨와 장경수씨에게 가마니를 공급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의 부산중앙시장 뒤의 청과시장 터에서 가마니 장사를 시작해 10년 가까이 이어가다가 31세가 되던 1929년 대궁양행을 설립했다.
장경호 창업회장은 일제의 쌀 수탈과 군수물자 수송을 위해 가마니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자 1935년 부산 광복동에 남선물산을 설립했다. 남선물산은 수산물 전국 도매업과 미곡사업을 했고 큰 정미소도 운영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상태 동국제강 명예회장이 동국제강 TQC경진대회를 참관하는 모습. <동국제강>
장경호 창업회장이 철강업을 시작하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
광복 직후 일본에서 살던 한국인 기술자가 남선물산 창고를 임차해 신선기(철선이나 동선의 직경을 점차 감소시켜 원하는 규격으로 만드는 기계)를 설치하고 나사와 못을 생산하고 있었는데 공장에 화재가 발생하면서 장경호 창업회장에게 신선기 1대를 사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장경호 창업회장은 신선기를 1대 인수하면서 철강업에 진출하고 조선선재라는 회사를 1949년 세웠다. 1년 뒤인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고 부산으로 피란민들이 몰려오면서 밤낮으로 못을 생산해도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울 상황이 됐다. 결국 조선선재는 급성장하는 계기를 맞았다.
6·25 전쟁이 휴전으로 일단락되고 장경호 창업회장이 본격적으로 철강업에 뛰어들 기회가 찾아왔다.
6·25 전쟁 통에 시설이 파괴된 한국특수강이 1954년 무렵 정상화할 경영자를 찾았던 것이다.
장경호 창업회장은 한국특수강을 인수하고 이를 토대로 자본금 1천만 환, 종업원 40명을 두고 동국제강을 설립했다.
장경호 창업회장은 16세 때 부산출신 추명순씨와 혼인해 슬하에 장상준, 장복임, 장상문, 장덕애, 장상태, 장상철, 장옥혜, 장종민씨를 두었다.
장경호 창업회장으로부터 동국제강을 물려받은 후계자는 셋째아들 장상태 명예회장이었다.
장상태 명예회장은 서울대학교 농대를 나와 미국 미시간주립대학교에서 석사를 마치고 잠깐의 공직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